■ 갖은 횡포에 시달리다 분노 폭발
[동아일보]
“나는 관노비(官奴婢)나 다름없었다.”
아시아태평양지역 주재 한 한국대사관저 요리사였던 A 씨(여)는 22일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흐느끼며 입을 열었다. 그는 지난해 3월 당시 한국대사 B 씨 가족이 사는 대사관저에 요리사로 파견됐다가 11개월 만에 귀국했다. A 씨는 “B 대사의 부인으로부터 상습적인 폭행과 욕설, 감금까지 당하다가 부당하게 해고돼 쫓겨났다”고 주장하며 울분을 토했다.
최근 B 대사가 현지 경비원을 폭행했다가 사직한 사건을 계기로 해외 주재 한국 대사관저의 요리사들이 “우리도 비인간적인 대접을 받아왔다”고 잇따라 폭로해 파장이 예상된다. 일부 요리사는 인권 침해와 부당해고 건과 관련한 법적 소송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외교부는 진상 조사에 나섰다.
○ 해외 대사관저는 ‘작은 청와대’
A 씨는 한국대사관저가 ‘작은 청와대’처럼 느껴졌다고 한다. 그만큼 관저에서 대사 가족의 권력이 대단했다는 의미다. A 씨는 “주방에서 일할 때 대사 부인에게 홍두깨로 머리와 팔 등을 빈번하게 맞았다”고 주장했다. 11개월 동안 대사관저 요리사로 일하면서 3번이나 지하실에 감금당했는데 그중 1번은 3주나 감금당해 영양실조로 현지 병원에 실려 갔다고도 했다. 그는 “감금당했을 때 현지 경찰에 신고했지만 대사관저가 치외법권 지역이라는 이유로 제대로 조치를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모든 해외 공관장 관사에는 대사나 총영사 부부를 위해 한국인 요리사가 외교부 고용으로 파견된다. 단신 부임이며 연봉은 국가별로 2500만∼3500만 원 수준이다. A 씨가 대사 가족에게 밉보인 건 연봉과 일요 근무 때문이었다고 한다. A 씨에 따르면 현지에 처음 도착한 지난해 3월 B 당시 대사 측이 “우리 대사관은 자체 내규상 일요일에도 일해야 한다”는 조건이 담긴 계약서에 서명을 강요했다. A 씨가 서명을 거부하자 대사 부인이 “어딜 싸가지 없이 말을 안 듣느냐. 그러다 여권 없이 국제 미아가 되는 수가 있다”고 협박해 억지로 서명한 후 미운털이 박혀 시도 때도 없이 구박당했다는 게 A 씨의 주장이다.
A 씨는 대사 가족이 현지인에게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고 전했다. B 당시 대사는 4월 방범봉으로 현지인 경비원의 엉덩이를 때렸다가 경비원이 현지 정부에 수사를 요청하고 외교부가 감사에 나서자 5월 사직서를 제출했다. A 씨는 “해고된 현지 경비원 중 1명은 ‘밖에서 B 대사를 만나면 찔러 죽이겠다’며 칼을 들고 다닌다는 말을 듣고 한국인인 게 부끄러웠다”고 말했다.
본보는 현재 한국에 있다는 B 전 대사의 해명을 듣기 위해 수차례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외교부 관계자는 “자체 조사 결과 B 대사와 요리사의 주장이 크게 다른 점이 많다. 객관적으로 조사해 진실을 규명하겠다”고 말했다.
○ “언젠가 터질 게 터졌다”
김모 씨(38)는 아프리카의 한 대사관저에서 요리사로 근무하던 지난달 18일 밤 갑작스러운 복통으로 응급실에 실려가 다음 날 맹장수술을 받았다. 김 씨는 수술 후 현지 의사에게 “2주 정도 회복기를 가져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다. 김 씨는 이 소식을 들은 대사 C 씨가 “뭘 2주씩이나 쉬느냐. 요리사를 바꾸라”며 지난달 24일 갑자기 해고를 통보했다고 주장했다.
김 씨는 또 대사 부부가 필요 이상의 만찬을 열어 공금으로 대사 개인의 식사비를 해결해 왔다고도 주장했다. 해외주재 대사들은 관저 내에서 공무와 무관한 가족끼리 하는 식사 재료는 사비로 구매해야 하는데 C 대사는 공금을 쓸 수 있는 만찬을 필요 이상으로 자주 열고 식자재를 많이 구입하게 한 뒤 남는 식자재를 개인 식사용으로 썼다고 주장한다.
김 씨는 “지난해 10월 초부터 7월 9일까지 공식 만찬만 40차례 열었는데 그중 외국인이 참가한 건 11차례뿐이었다”고 말했다.
C 대사는 본보와의 국제전화에서 “김 씨가 불결하게 주방을 관리해 딸이 장티푸스에 걸리고 나도 급성요도 방광염을 앓았다. 김 씨가 식자재 창고에 담배꽁초가 담긴 병을 둘 만큼 위생 관리가 안 돼 수차례 지적했는데 고쳐지지 않았다”며 “김 씨의 과실에 책임을 물어 해고하면 김 씨에게 명예롭지 못할 수 있는 점을 배려해 맹장 수술을 이유로 해고 통보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현재 동남아에서 근무하는 D 씨(여)도 22일 본보와의 통화에서 “만찬용 식재료를 정량대로만 사오면 대사 부인이 ‘이렇게 요리사하면 안 된다’고 면박을 준다”고 주장했다.
해외 대사관저에서 근무하는 한국 요리사들은 “언젠가 터질 게 드디어 터졌다”는 반응이다. 15년이 넘게 아프리카 동남아 등에서 관저 요리사를 해온 E 씨는 본보와의 통화에서 “관저 요리사들은 오래전부터 부당한 인권 침해를 당해왔지만 용기가 없어 나서지 못했던 것일 뿐”이라며 “계약서에 명시된 근무시간을 한참 초과해서 일을 시켜도 대사 부인끼리 공유하는 ‘요리사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오를까봐 아무도 문제 제기를 못했다”고 말했다.
김성모·조동주 기자 m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