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news/사회

뉴욕타임스, 박근혜 ‘닭’ 표현 보도, 한국 표현의 자유 있나?

원문 출처 : http://thenewspro.org/?p=6860


뉴욕타임스, 박근혜 ‘닭’ 표현 보도, 한국 표현의 자유 있나?

-홍성담 화백 ‘세월오월’ 전시 거부 상세하게 보도

-세월호 참사 ‘국가에 의해 자행된 만행


뉴욕타임스가 장문의 기사로 박근혜의 한국에 과연 표현의 자유가 있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광주비엔날레에서 한국의 대표적인 저항화가 홍성담의 작품 ‘세월오월’의 전시가 거부된 일을 두고서다. 뉴욕타임스는 30일 이 사건을 조명하며 박정희 시대로부터 박근혜 시대에 걸쳐 그림을 통해 저항해온 홍성담씨의 삶과 그림의 수난을 상세하게 보도했다.


뉴욕타임스는 ‘An Artist Is Rebuked for Casting South Korea’s Leader in an Unflattering Light-한국 대통령을 비호감으로 그려 화가 질책 받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게재하고 세월호 참사에 대해 저항하는 박근혜를 희화한 모습이 담긴 홍성담 화백의 가로 34 피트 세로 8 피트의 그림이 겸열에 의해 광주비엔날레에서 철회됐다고 전했다.


뉴욕타임스는 홍화백이 그림을 약간 손보며 박근혜를 비평가들에 의해 사용되는 별명인 닭근혜를 가리키는 닭으로 대통령의 캐리커처를 바꿨고 깜짝 놀랜 시 공무원이 그 작품을 거부했다고 전했다. 한국에서는 일반화된 닭근혜라는 표현이 세계 최고의 권위지에 등장하는 순간이다.


특히 뉴욕타임스는 검열에 대해 ‘북한 공산정권을 추종한다는 혐의를 받는 자들에게 주로 가해지는 검열의 형식’이라고 표현하며 “이것은 예술가에 대한 말도 안되는 모독이다. 그들이 한 일이 바로 내가 작품에서 말하고자 한 것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박근혜 아래에서 이 나라는 그 아버지의 시대에 있었던 오래된 관행,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관행으로 퇴보하고 있다.”는 홍화백의 말을 전했다.


심지어 뉴욕타임스는 박근혜의 아버지인 박정희 독재시대에 피카소라는 이름의 크레파스가 피카소가 공산당원이었다는 이유로 금지당한 사실도 거론했다. 홍성담씨의 작품은 쿠데타를 도모한 후 거의 이십년에 걸쳐 한국을 통치했던, 고인이 된 아버지에 의해 조종당하는 허수아비로 박 대통령을 묘사하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세월과 오월’이라는 제목의 이 작품이 세월호의 참사와 광주학살 두 가지를 모두 암시하고 있다고 전하며 이 논란으로 인해 한국에서의 예술적 표현의 한계에 대한 오랜 기간에 걸친 질문이 다시 제기됐다고 보도했다.


뉴욕타임스는 홍성담씨가 광주에서 친구들의 학살을 직접 두눈으로 목격한 뒤 자신의 미술을 저항의 도구로 사용해왔다며 “국가의 잔혹성을 기록하고 고발하는 일을 내 일생의 의무로 하겠다고, 그 때에 결심했다. 화업은 나의 언어이자, 나의 피켓이며, 나의 플래카드이다.”라는 홍화백의 말을 전했고 그 후 홍성담씨의 수감생활 등 정권에 의한 수난의 과정을 상세하게 따라가며 소개했다.


뉴욕타임스는 홍 화백은 세월호 그림에 대한 반응을 현안문제들에 대해 공개적으로 논할 수 없을 정도로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사회로서의 징후로 본다며 “정치권력에 대한 풍자가 범죄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는 말을 소개하며 기사를 마무리했다.


뉴욕타임스의 이 기사는 박근혜 정권에서의 한국이 과연 독재국가인가, 아니면 자유가 허용되는 민주주의국가인가를 묻고 있다. 독재자 아버지를 두고, 그 유신독재의 잔재들에 의해 대통령을 강탈한 박근혜, 이제 뉴욕타임스가 그녀에게 독재자인가라고 묻고 있다.


다음은 뉴스프로가 번역한 뉴욕타임스의 기사전문이다.

An Artist Is Rebuked for Casting South Korea’s Leader in an Unflattering Light

한국 대통령을 비호감으로 그려 화가 질책 받다

By CHOE SANG-HUN AUG. 30, 2014



The artist Hong Sung-dam with a replica of “Sewol Owol,” which was pulled from the Gwangju Beinnale for its parodies of the president. Credit Jean Chung for The New York Times 대통령을 패러디한 이유로 광주 비엔날레에서 전시가 취소된 자신의 작품 “세월오월”의 복사판과 함께, 홍성담 화백


GWANGJU, South Korea — After 250 South Korean high school students died in the sinking of the Sewol ferry in April, the artist Hong Sung-dam lashed out at a political and business elite he considers responsible for the disaster, doing so in the way he knows best. He painted, pouring his protest onto canvas just as he did during the country’s long years of military dictatorship.


한국 광주 – 지난 4월 세월호 침몰로 250명의 한국 고등학교 학생들이 사망한 후 화가 홍성담은 이 참사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정치적, 사업적 엘리트 층에 대한 비난을, 자신이 가장 잘 할 줄 아는 방법으로 퍼부었다. 그는 한국의 긴 세월의 군사 독재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저항을 화폭에 쏟아내며 그림을 그렸다.


He was not imprisoned this time, as he was in the waning years of military-backed rule. But Mr. Hong’s 34 foot by 8 foot canvas, which includes a caricature of President Park Geun-hye, was pulled from South Korea’s best-known international art festival in a type of censorship usually reserved for those accused of supporting communist North Korea.


이번에는 군부가 뒤를 받쳐주던 정권이 기울어가던 당시에 그랬던 것처럼 투옥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을 희화한 모습이 담긴 홍 화백의 가로 34 피트 세로 8 피트의 그림은 북한 공산정권을 추종한다는 혐의를 받는 자들에게 주로 가해지는 검열의 형식으로, 한국에서 가장 잘 알려진 국제 미술전에서 철회됐다.


“This is a ridiculous insult to an artist,” Mr. Hong said of the treatment of the painting, in which Ms. Park is depicted as a puppet controlled by her late father, who led the country for nearly two decades after engineering a coup. “What they did was proof of what I tried to say in the painting. Under Park Geun-hye, the country is reverting to the old practices of her father’s era, repressing freedom of expression.”


“이것은 예술가에 대한 말도 안되는 모독이다”고 홍 화백은, 쿠테타를 도모한 후 거의 이십년에 걸쳐 한국을 통치했던, 고인이 된 아버지에 의해 조종 당하는 허수아비로 박 대통령을 묘사한 자신의 작품이 겪고 있는 논란에 대해 말했다. “그들이 한 일이 바로 내가 작품에서 말하고자 한 것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박근혜 아래에서 이 나라는 그 아버지의 시대에 있었던 오래된 관행,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관행으로 퇴보하고 있다.”



“Satirizing political power should not be a crime,” said Mr. Hong, criticizing the elite. Credit Jean Chung for The New York Times “정치권력에 대한 풍자가 범죄로 여겨져서는 안된다”고 홍 화백은 엘리트 층을 비판하며 말했다.



Ms. Park’s administration has come under withering criticism since the disaster, first for a botched rescue effort, then for resisting the kind of broad independent investigation the victims’ families have demanded into the muddled emergency response and the lax government regulatory system many say helped lead to the sinking.


먼저, 실패한 구조 작업에 대해서, 그리고 그 이후 갈팡질팡했던 응급상황대처와 많은 이들이 침몰을 유발했다고 보는 느슨한 정부 규제 시스템에 대해 희생자 유가족들이 요구해 온, 폭 넓고 독립적인 수사를 거부하는 것에 대해서 박근혜 정부는 참사 이후로 맹비난을 받아왔다.


The painting, which Mr. Hong painted with other artists he invited to participate, shows the doomed ship at its center, upside down. Two enormous figures have lifted it out of the water, and — in an imagined happier ending — the passengers are emerging from the boat, smiling and waving. Surrounding that scene is a phantasmagoria of politically charged images from South Korean history, some dating from the country’s years of military rule. A prisoner is tortured under interrogation, and sinister figures lurk, wearing sunglasses and army uniforms.


참여하도록 초대한 다른 화가들과 함께 홍 화백이 그린 이 그림은 뒤집어진 불운의 배를 중앙에 보여준다. 2명의 거대한 사람이 배를 물에서 들어올렸고 – 가상의 행복한 결말로서 – 승객들이 미소를 짓고 손을 흔들며 배에서 빠져나온다. 이 장면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군사정부 시절 당시의 인물 몇몇을 포함해서 한국 역사의 정치적인 인물들이 주마등처럼 나열되는 모습이다. 재소자가 수사 중에 고문을 당하고 선글라스와 군복을 입은 사악한 사람들이 몸을 숨기고 있다.


Gwangju’s leaders defended their initial refusal to allow the painting in the festival, the Gwangju Biennale, an act that was unexpected in a city with a long history of resistance to conservative political power.


광주시 지도부는 이 작품이 광주비엔날레 축제에 출품되는 것을 거부한 자신들의 행동, 즉 보수적인 정치권력에 대항하는 오랜 저항의 역사를 가진 도시에서 나오리라고 예상되지 않았던 행동에 대해 변명했다.


“We demanded the exclusion of Mr. Hong’s painting because of its explicit political intention, such as the parodying of the president,” Oh Hyeong-guk, a vice mayor of Gwangju, told reporters this month, adding that the city could not tolerate such a work in an art exhibition it helped finance. But as criticism mounted, the city later backtracked a bit, leaving the final decision to the festival’s authorities, who banned the painting.


“대통령 풍자 등 명확한 정치적 의도 때문에 홍 화백의 그림을 제외할 것을 요구했다”고 오형국 광주시 행정부시장이 이달 기자들에게 말하며 시의 지원을 받는 예술 전시회에 이러한 작품을 용인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비판이 거세지자 광주시는 후에 그 입장에서 약간 물러나서 전시회 전문가들에게 최종 결정을 맡기겠다고 했고 전시회 측은 이 그림의 전시를 금했다.


Some artists pulled out of the biennale in protest, and a few of its top officials resigned, saying they were torn between defending Mr. Hong’s freedom of expression and respecting the wishes of the city, one of the event’s main financial backers.


일부 화가들은 항의의 표시로 비엔날레 참여를 철회했고 몇몇 고위직 임원들이 홍 화백의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것과 행사의 주요 재정후원자 중 하나인 광주시의 바램을 존중하는 것 사이에서 어쩌지 못하고 사퇴했다.


The controversy, which Ms. Park’s office has not commented on, has renewed longstanding questions about the limits to artistic expression in South Korea.


박근혜 정부에서는 아무런 대응이 없었지만, 이 논란으로 인해 한국에서의 예술적 표현의 한계에 대한 오랜 기간에 걸친 질문이 다시 제기됐다.


South Korean artists are vastly freer than they were under military rule, when a brand of crayon called Picasso was once banned because of the artist’s Communist associations. But artists who venture into political satire — like other government critics — often say they feel ostracized and harassed, and unflattering depictions of political leaders can lead to lawsuits and even criminal defamation charges.


한국의 예술가들은, 피카소라는 브랜드의 크레파스가 그 예술가가 공산당 일원이었다는 이유로 한때 금지됐던 독재정권 아래에서보다는 훨씬 더 자유롭다. 하지만 정치적 풍자를 감행하는 예술가들은 – 다른 정부 비판가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이 배척되고 시달림을 당하는 것으로 느낀다고 종종 말하며, 정치 지도자들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은 묘사를 해서 소송에 휘말리거나 명예훼손죄로 고소당하기까지 한다.


For Mr. Hong, a 59-year-old painter who decades ago was jailed and tortured for his political expression, the fight over the painting is the latest skirmish in a long battle with repressive forces he believes are still at work.


십수년전에 정치적인 표현때문에 수감되어 고문당했던 59세의 홍 화백에게 있어, 그림에 대한 논란은 그가 생각하기에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억압적인 권력과의 오랜 투쟁을 보여주는 최근의 작은 예이다.


“He is the last standing artist of resistance from the days of dictatorship,” said Gim Jong-gil, an art critic.


“그는 독재정권시절로부터 최후로 남은 저항의 예술가이다”고 미술평론가 김종길은 말했다.


As a young man, Mr. Hong studied art in Gwangju, which in the 1970s was a center of activism against the dictatorship of Park Chung-hee, Ms. Park’s father. By the time Mr. Park’s rule ended with his assassination in late 1979, Mr. Hong was an award-winning painter and a participant in the city’s underground pro-democracy movement.


홍 화백은 젊은 시절, 1970년대 박 대통령의 아버지 박정희의 독재정권에 맞선 저항운동의 중심지인 광주에서 미술을 공부했다. 1979년 암살로 박정희 통치가 막을 내릴 즈음, 홍 화백은 입상한 화가로 활동하며 동시에 광주의 지하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다.


Hopes that Mr. Park’s death would lead to democratization were soon crushed as power was seized by Gen. Chun Doo-hwan, one of Mr. Park’s proteges who was the head of military intelligence during the last year of his rule. Gwangju erupted in protests, and the regime sent tanks and paratroopers into the city in May 1980, killing hundreds.


박정희의 죽음으로 곧 민주화가 이루어지리란 희망은, 박정희의 총애 받던 후진의 한 사람이며 박정희 통치 마지막 해에 국군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 장군이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곧 짓밟히고 말았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시위가 일어났고, 정권은 탱그와 공수부대원을 투입하여 수백명을 죽였다.


“I saw with my own eyes so many of my friends and colleagues killed,” Mr. Hong said. “I decided then and there I would make it my lifetime duty to record and indict state brutality. Painting is my language, my picket protest, my placard.”


“너무나 많은 친구들과 동료들이 죽어가는 것을 내 두 눈으로 목격했다”고 홍 화백은 말했다. “국가의 잔혹성을 기록하고 고발하는 일을 내 일생의 의무로 하겠다고, 그 때에 결심했다. 화업은 나의 언어이자, 나의 피켓이며, 나의 플래카드이다.”


Under Mr. Chun’s rule, Mr. Hong, who was often on the run from the authorities, produced lithographs depicting scenes from the Gwangju massacre. But he is best known for his large canvases, which have often focused on South Koreans who suffered at the hands of their leaders.


전두환 통치 하에서, 당국의 눈을 피해 종종 도망을 다녀야했던 홍 화백은 광주학살 장면을 묘사한 석판화를 제작했다. 그러나 그는 국가 수장에 의해 고통을 받는 한국인들을 주로 그린 대형 캔버스화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Mr. Hong’s works, along with pieces by other activist artists, were put to use by the student-led democracy movement of the 1980s. Police officers using tear gas raided university campuses and tore their paintings down.


홍 화백의 작품은 다른 운동권 예술가들의 작품과 함께 1980년대 학생들이 주도하는 민주화 운동에 사용됐다. 경찰은 최루가스를 사용해 대학 캠퍼스를 급습하여 그들의 그림을 없앴다.


Although Mr. Hong escaped imprisonment during the darkest years of dictatorship, he was arrested in 1989 as the country was moving toward democracy. Mr. Hong was arrested after sending slides of some of his work, including a painting that depicted the Gwangju uprising, to Korean-Americans who were headed to a youth festival in Pyongyang, North Korea. He was deemed to have violated the National Security Law, still in effect today, which prohibits any act judged to be “helping the enemy” in North Korea. He was interrogated under torture and spent three years in prison.


홍 화백운 어두운 독재정권 치하에서 투옥을 피하긴 했지만, 한국이 민주주의를 향해 나아가던 1989년에 구속됐다. 북한의 평양에서 청년축제를 기획하던 한국계 미국인들에게 광주시민혁명을 그린 작품을 포함한 자신의 작품들을 슬라이드에 담아 보낸 후, 홍 화백은 체포됐다. 그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법으로서 북한의 “적을 이롭게 한 것”으로 판단되는 어떠한 행동도 금지하고 있는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것으로 간주됐다. 그는 고문을 당하고 심문을 받았으며 3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After South Korea’s transition to democracy in the 1990s, most artists who had been active in the resistance to military rule moved on to other themes. But Mr. Hong continued to produce politically oriented work. In 2012, when the conservative Ms. Park ran for president, he made her a target. One scathing painting showed Ms. Park doing the now-famous “Gangnam Style” dance created by a South Korean performer. She was dancing below a noose, an allusion to the hanging of dissidents under her father’s regime. Another painting put Ms. Park in a delivery room, having just given birth to a baby who resembles her late father.


1990년대 한국이 민주주의 체제로 전환된 이후 군의 통치에 저항하는 활동을 해왔던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다른 주제들로 넘어갔다. 하지만 홍 화백은 정치적 지향의 작품을 만들어내는 일을 계속했다. 2012년 보수 박근혜가 대통령후보로 나섰을 때 그는 그녀를 표적으로 삼았다. 그의 신랄한 한 작품은 한국의 한 가수가 만든 이제 유명한 ‘강남스타일’ 춤을 추고 있는 박 대통령을 보여줬다. 아버지 통치 하에서 반대파들이 교수형을 당한 것에 대한 암시로 그녀는 교수대 올가미 아래서 춤추고 있었다. 또 다른 그림은 분만실에서 박 대통령이 고인이 된 자신의 아버지를 닮은 한 아이를 방금 출산한 모습을 보여줬다.


Furious conservative politicians have compared Mr. Hong to Joseph Goebbels. The National Election Committee accused him of violating South Korean election law, which prohibits defaming candidates with the intent of preventing their election. But he was not charged. (Another artist, Lee Ha, was less fortunate; he was indicted after depicting Ms. Park as Snow White, holding a rotten apple with her father’s image engraved in its skin. He was acquitted two years later.)


격노한 보수 정치인들이 홍 씨를 조셉 궤벨스에 비유했다. 한국 선거관리위원회는 일정 후보의 선출을 방해할 의도로 후보자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을 금하고 있는 선거법의 위반으로 그를 고발했다. 하지만 그는 기소되지 않았다. (운이 그만큼 좋지 않았던 또 다른 예술가 이하 화백은 사과껍질에 아버지의 모습이 그려진 썩은 사과 하나를 들고 있는 백설공주로 박근혜를 그린 후에 기소됐다. 그는 2년 후에 무죄선고를 받았다.)


“Sewol Owol,” Mr. Hong’s painting about the ferry sinking, alludes both to the disaster of the ferry, the Sewol, and the Gwangju killings. (“Owol” means May, the month when the massacre occurred.) Both events hit especially close to home for Mr. Hong, who not only witnessed the Gwangju murders, but has lived for years in Ansan, the city where the high school students who died aboard the Sewol were from.


홍 화백의 여객선 침몰을 그린 “세월오월”은 세월호의 참사와 광주학살 두 가지를 모두 암시한다. (‘오월’은 대학살이 일어났던 5월을 의미한다.) 두 사건들 모두 홍 화백에게는 특별히 절실한 것으로서, 그는 광주학살을 직접 목격했고, 세월호에서 사망한 고등학교 학생들이 살던 안산에 여러 해 동안 살았다.


One of those students, a girl who was in her junior year and who he said came from a poor family, worked part-time at his studio to help earn money and pick up skills to pursue her dream of being a painter. “Thirty-four years after the Gwangju massacre, in the Sewol disaster, I saw another massacre perpetrated by a cartel of crude capitalist businesses, corrupt bureaucrats and an irresponsible and feckless government,” Mr. Hong said, referring to the corporate greed and government corruption that investigators say contributed to the disaster. “This was state brutality.”


그의 말에 따르면, 그 학생들 중 한 명인 가난한 가정 출신의 고교 2학년이었던 한 소녀는 돈도 벌고 또한 화가가 되고자 하는 자신의 꿈을 좇아 실력을 쌓기 위해 그의 스튜디오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조사관들이 참사의 원인이라고 본 기업의 탐욕과 정부의 부패를 가리키며, “광주 학살 이후 34년이 지나 발생한 세월호 참사에서, 나는 천박한 자본주적 상업성, 부패한 관료 집단, 무책임하고 무능력한 정부라는 카르텔에 의해 자행된 또 하나의 학살을 보았다”고 홍 화백은 말했다. “이것은 국가에 의한 만행이었다.”


After the city’s original rejection of his work, he retooled the painting, slightly. He replaced the caricature of the president with a chicken, a reference to a nickname used by critics: Geun-hye, the chicken. Startled city officials rejected that version as well.


그의 작품에 대한 시의 당초 거부 의사 이후, 그는 해당 그림을 약간 손보았다. 그는 비평가들에 의해 사용되는 별명인 닭근혜를 가리키는 닭으로 대통령의 캐리커처를 바꿨다. 깜짝놀란 시 공무원은 그 작품 역시 거부했다.


Mr. Hong sees the reaction to the Sewol painting as symptomatic of a dysfunctional society that cannot discuss its problems openly. Such a society, he said, is prone to disasters.


홍 화백은 세월호 그림에 대한 반응을 현안문제들에 대해 공개적으로 논할 수 없을 정도로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사회로서의 징후로 본다. 그런 사회에서는 참사가 일어나기 쉽다고 그가 말했다.


“Satirizing political power should not be a crime,” he said.


“정치권력에 대한 풍자가 범죄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고 그는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