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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에 대한 유럽중심 근대주의적 해석 극복해야”


“민족에 대한 유럽중심 근대주의적 해석 극복해야”

[기획-다시 민족을 생각한다①] 강철구 전 이화여대 사학과 교수

 최명규 기자 acrow@vop.co.kr

 입력 2013-08-14 16:50:12l수정 2013-08-19 12:3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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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소리 기획 '다시 민족을 생각한다' 를 시작하며


<민중의소리>는 8월 네번째 주에 '다시 민족을 생각한다'는 제하의 기획을 연재합니다. 
이번 기획은 우리 사회에서 민족과 민족문제에 대한 인식이 점차 약화되고 있음에 대한 우려의 표시이며, 여전히 우리 사회의 근본 문제로 남아있는 외세 의존에 대한 문제제기입니다. 
기획은 민족에 대한 유럽 중심의 근대주의적 해석에 대한 강철구 전 이화여대 교수의 문제제기로 출발하며, 자주적 변화의 길을 가로막고 있는 '검은 머리의 미국인'에 대한 비판, 그리고 동북아 정세를 바라보는 시각으로 이어집니다.


민족, 또는 민족주의라는 개념은 어느덧 낡은 시대의 유물로 취급받고 있다. 보수나 진보 진영을 가릴 것 없이 민족주의와 선을 긋고자 하는 분위기가 형성된 지는 오래됐다. 


그렇다면 왜 민족과 민족주의는 이러한 대접을 받게 된 것일까? 그간 이 문제에 천착해 온 민족미래연구소 고문 강철구 전 이화여대 사학과 교수는 유럽 중심의 근대주의적 해석에 한국 사회가 지나치게 경도돼 있다고 주장해 왔다. ‘민중의소리’는 13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 있는 민족미래연구소 사무실에서 강 전 교수를 만났다. 그는 근대주의적 민족이론의 내용을 하나하나 세심하게 설명하면서 그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했다.


“근대주의 민족이론, 역사적 사실 부합되지 않는 경우 많아”

“민족주의는 산업화의 결과? 프랑스 혁명은 그 이전…동유럽·아시아·아프리카도 무관”


민족주의에 대한 근대주의적 해석의 장을 연 사람은 ‘민족과 민족주의’를 쓴 영국의 철학자 어네스트 겔너(Ernest Gellner)다. 이와 함께 ‘상상의 공동체’를 쓴 베네딕트 앤더슨(Benedict Anderson), ‘1780년 이후의 민족과 민족주의’의 저자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도 근대주의적 민족이론에서 중요한 학자로 꼽힌다. 


강 전 교수에 따르면 이들이 내세운 주요 주장은 크게 다섯 가지로 볼 수 있다. △민족은 ‘근대의 산물’ △민족은 민족주의라는 관념이 만들어낸 ‘인위적 구성물’ △민족주의는 약화되는 지배계급의 지배력 재강화를 위한 ‘억압적 성격’의 이데올로기 △민족주의는 배타적이고 공격적이며 전쟁을 야기 △지구화 시대에서 기능을 다한 민족과 민족주의는 소멸이 그것이다. 


근대주의자들이 민족이나 민족주의를 ‘근대의 산물’로 보는 것에 대해 강 전 교수는 “지나치게 근대적 요소를 강조하고, 그에 따라서 근대와 전(前)근대 사이의 질적 차이를 강조하기 때문에 비역사적인 접근을 하게 된다는 것은 상당한 문제”라고 비판했다. 그는 “이런 주장들은 역사적 사실들에 부합하지 않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고 지적했다. 


겔너의 경우 ‘산업화’의 결과로 민족주의가 나타났다고 주장했지만 이들이 기점으로 삼는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것은 산업화 이전 시기다. 또한 19세기 후반 동유럽이나 20세기 아시아, 아프리카에 새롭게 형성된 민족들도 산업화와는 연관이 없다. 따라서 “산업화와 민족의 형성을 결부시키려는 시도는 역사적으로는 지지받기가 어렵다”는 것이 강 전 교수의 설명이다. 


베네딕트 앤더슨이 민족을 ‘상상의 공동체’로 규정, 근대의 인위적인 산물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도 강 전 교수는 “민족이 ‘역사적’으로 형성된 과정을 경시하는 것”이라며 “긴 경우 수천 년, 또는 수백 년에 걸쳐 종족성 정체성이 어떻게 형성됐고 문화가 어떻게 응집됐는지를 간과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물론 19세기 이후 민족주의 엘리트들이 민족형성 과정에 일부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사실이나 그것도 종족성이라는 핵심이 존재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강조했다. 


강철구 민족미래연구소 고문이 13일 오후 서울 마포구의 사무실에서 민중의소리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강철구 민족미래연구소 고문이 13일 오후 서울 마포구의 사무실에서 민중의소리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양지웅 기자


“근대와 전근대 민족주의, 범위 차이일뿐 질적 차이 없다”

“1320년 스코틀랜드 아브로스 선언, 상당한 정도의 ‘민족 정체성’ 갖고 있어” 


강 전 교수는 또한 근대주의자들이 근대와 전근대 사이의 질적 차이를 강조하고 있지만 지나치게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고 있을뿐더러 실제로 보면 내용상으로도 크게 차이가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근대주의자들은 근대 민족주의는 명확한 정치 이데올로기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전근대의 민족주의와는 구분된다고 생각하는데 그 기준은 △주권이 왕이나 귀족이 아닌 민족 전체에게 있다는 ‘민족 주권’ △외세의 지배를 용납해서는 안 된다는 ‘민족자결’의 원리△정치적 운동 일으킬 정도로 민족의식 등이 성숙할 것, 즉 ‘민족 정체성’의 문제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 이후에도 민족주권이이나 민족 정체성 개념이 충분히 관철되지는 않았다는 것, 다시 말해 근대주의자들이 제시한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했다는 것이 강 전 교수의 지적이다. 그는 혁명 이후에도 자신이 민족의 일원으로 느끼는 사람들은 부르주아 계급을 중심으로 해서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반면 근대주의자들의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지 않는다면 근대 이전에도 근대 민족주의의 내용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1320년 스코틀랜드인들이 잉글랜드 에드워드 1세의 핍박에 맞선 아브로스(Arbroath) 선언에 보면 다음과 같은 표현이 나온다. 


‘스코트족은 대 스키타이에서 와서 (중략) 많은 승리와 노력을 하여 오늘날의 영토를 확보했다. (중략) 외부인에 의해 왕통이 무너진 적이 없다. (중략) 결코 어떤 조건 하에서도 잉글랜드인의 지배에 복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에 대해 강 전 교수는 “민족의 기원과 영토, 민족적 특수성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이것은 민족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다. 상당한 정도의 민족 정체성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이에 서명한 사람들은 스코틀랜드의 지배 계층인 영주들, 성직자들, 부유한 자유농들에 한정돼 있다. 하지만 18세기 프랑스 혁명 이후와 마찬가지로 민족 정체성을 갖는 사람들의 범위는 이후 역사적인 과정 속에서 확장된다. 


강 전 교수는 “중요한 점은 전근대 민족주의가 근대 민족주의의 기준으로 보면 불완전한 것은 사실이지만 둘 사이에 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고 단지 정도나 범위의 차이일 뿐”이라며 “민족이나 민족주의를 절대적으로 근대적 현상으로 보는 근대주의자들의 태도는 문제가 많다”고 강조했다. 


“우리 학문은 서양 학문에 과도하게 종속”

“근대주의적 해석 철저히 검토하고 극복해야”


이 같은 문제 지점들이 있음에도 한국에서는 비판적 문제의식 없이 근대주의적 민족이론을 수용하게 됐고, 이는 민족과 민족주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만드는 주요한 이유가 됐다는 것이 강 전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근대주의적 해석은 근대의 유럽을 그 준거틀로 보고 다른 지역의 민족주의를 판단하는 것”이라며 “우리 학문은 서양 학문에 과도하게 종속돼 있으며 민족주의 이론도 예외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이어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영미계 학자들”이라며 “영국이나 미국은 신자유주의 체제의 중심 국가들로서 그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자기네에게 가장 유리한 나라들이다. 자연히 그에 대해 저항하는 민족주의는 그들에게 불편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고 비판했다. 


따라서 강 전 교수는 현재 주류로 자리 잡고 있는 민족과 민족주의에 대한 서양 중심의 근대주의적 이론을 우리의 시각에 맞게 비판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강대국과 약소국의 이론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것은 우리가 민족주의 이론에 대해서도 보다 관심을 갖고 깊이 있게 대응해야 할 이유”라며 “민족주의에 대한 근대주의적 해석을 철저하게 다시 검토하고 그것을 극복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강철구 민족미래연구소 고문이 13일 오후 서울 마포구의 사무실에서 민중의소리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강철구 민족미래연구소 고문이 13일 오후 서울 마포구의 사무실에서 민중의소리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양지웅 기자

다음은 강철구 전 교수 인터뷰 전문이다.


민족, 또는 민족주의는 한국사회에서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유물처럼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한국사회에서 민족주의가 상당히 신성하다 할까, 그런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90년대 중반부터 민족주의를 폄훼하거나 백안시하는 태도들이 강화됐는데 우선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이 쓴 ‘1780년 이후의 민족과 민족주의’라는 책의 영향이 컸던 것 같다.

또 하나는 97년 12월이죠, IMF를 맞으면서 신자유주의 체제에 함몰되지 않았나.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자신감을 잃고 민족주의의 전망을 잃어버린 것 같다. 그래서 민족주의를 그야말로 낡은 것, 시대에 뒤떨어진 것, 이런 이데올로기로 보는 경향이 생겼다. 유감스러운 일인데 그만큼 우리나라 사람들이 내적인 힘이 부족해서 그런 것 아닌가 생각한다. 

구체적으로 보자면 크게 세 가지 이유로 볼 수 있겠는데, 하나는 지구화라고 하는 현상을 들 수 있겠다. 세계가 하나로 묶이고 있다. 그래서 인터넷이나 각종 매스미디어가 발전하면서, 그 다음에 장거리 운송수단이 발달하면서 시공간이 압축되고 있다. 또 유럽연합(EU), 나프타(NAFTA:북미자유무역협정) 등 지역통합도 나타나고 있다. 거기에 바로 신자유주의를 통한 세계 경제의 통합도 빼놓을 수 없다 생각한다. 그래서 최근 들어와서 급격한 변화를 보이고 있는 여러 가지 현상을 보면 민족을 단위라고 하는 체제가 시대에 뒤떨어진 것 아니냐, 이렇게 느낄 수 있고, 그래서 그런 것이 사람들한테 많은 영향을 주지 않았나 생각한다. 

제 생각에는 완전히 불가역적인 현상은 아니라고 본다. 기술진보는 어쩔 수 없지만 지역통합이나 경제통합은 언제든지 되돌아갈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세계경제가 굉장히 어려운 상태에 있는데 잘못하면 공황 상태로 빠질 수도 있고 장기적인 경기 침체로 갈 수 있는데, 그렇게 되면 지역 통합도 충분히 와해될 가능성도 있다고 보고 있다. 

두 번째는 냉전체제가 끝난 다음에 구 유고슬라비아나 구 소련 등의 지역에서 일어난 종족 분규나 학살, 보스니아에서 대규모 학살이 있었다. 또 이슬람 지역에서 벌어진 고질적인 테러리즘이 민족주의에 대해 좋지 않은 인상을 주지 않았나 생각한다. 

세 번째는 민족주의의 근대주의적 해석이란 건데, 1980년대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실제로 시작된 건 60년대부터 시작했지만. 이 새로운 해석이 민족주의를 부정적으로 보고 비판적으로 보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으로 생각한다. 

이것을 시작한 사람이 영국의 정치학자이자 철학자인 어네스트 겔너(Ernest Gellner)다. 그는 1983년에 근대주의적 해석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책으로 ‘민족과 민족주의’(Nations and Nationalism)를 썼다. 말하자면 민족주의 해석의 신기원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같은 해에 미국의 인류학자인 베네딕트 앤더슨(Benedict Anderson)이 ‘상상의 공동체’(Imagined communities:reflections on the origin and spread of nationa)를 썼고, 몇 년 뒤인 1990년에 에릭 홉스봄이 ‘1780년 이후의 민족과 민족주의’(Nations and nationalism since 1780)를 썼다. 이 세 책이 대중적으로 알려진 책이고 그 외에도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이런 쪽 연구를 하고 있다. 

새로운 해석들이 나오고 이것을 서양에서 민족주의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대거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삽시간에 주류적 해석으로 올라서게 된다. 민족주의를 보는 관점을 완전히 바꿔버리게 된 것이다.


민족과 민족주의에 대한 근대주의적 해석이 이러한 분위기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지적이다. 그렇다면 그 내용은 무엇인가?



이들 이론의 주요 주장은 크게 다섯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민족은 근대의 산물이라고 하는 주장이다. 즉, 민족이 근대에 들어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시점으로 보면 18세기 말, 19세기 초인데, 이는 프랑스 혁명과 산업혁명을 계기로 만들어졌다는 의미이다.

그 다음에 민족은 민족주의가 만든 인위적 구성물이다, 이런 주장을 하고 있다. 그 전의 주류적 해석은 ‘영속주의’였다. 영속주의는 민족이 생긴 지가 굉장히 오래됐다는 것이다. 짧아도 몇 백 년, 길게는 몇 천 년 됐다는 얘기다. ‘우리 민족이 5천년 됐다’는 주장이 영속주의적 주장이다.

그런데 이 사람들(근대주의자들)은 그런 것이 아니고 생긴 지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민족이라고 하는 것이 자연적으로 생긴 것이 아니고 민족주의라는 관념이 만들었다고 얘기한다. 굉장히 새로운 주장이었다.

세 번째, 19세기 들어오면 유럽 선진국들에서 민주주의의 흐름이 나타나게 된다. 이렇게 되니까 교회나 왕의 영향력이 약화된다. 그래서 지배계급이 대중에 대한 지배력을 다시 강화시키기 위해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민족주의라는 주장이다. 그렇기 때문에 억압적 성격을 갖는 이데올로기라고 하는 얘기다. 

네 번째는 윤리적 측면인데, 민족주의는 다른 민족에 대해 배타적이고 공격적이고 전쟁을 일으킨다는 주장이다. 또 우리는 단일 종족으로 된 민족이지만 많은 나라들은 다종족으로 구성된 민족들이다. 이런 다종족 국가에서 소수종족에 대한 억압, 심하면 학살을 가져온다, 그래서 좋지 않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지구화 시대에 들어와 민족과 민족주의는 그 기능을 다했기 때문에 얼마 있지 않아 소멸해버린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매우 도발적인 주장인데, 90년대 이후에 서양에서 주류 해석으로 받아들여지니까 한국 사람들도 냉큼 받아들였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도 민족과 민족주의가 일방적인 비난, 매도의 대상이 돼 버린 것이다.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은 보수세력 내에서도 나오고 진보세력 내에서도 나온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보수세력은 기본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외세 의존적인 세력이고 실제로 냉전에 기생해 온 세력이다. 그러니까 민족주의에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실제로 한국의 민족주의 세력은 일제 치하에서 계속 성장하다가 6·25를 통해 보수세력에 의해 완전히 분쇄돼 버렸다. 뿌리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돼 버렸다. 

최근에는 신자유주의와 보수세력이 결합하면서 FTA(자유무역협정)이나 금융개방을 통해 신자유주의 체제를 유지·강화하려는 태도를 갖고 있고, 민족주의라는 것이 경제적 자족성 추구하는 것 아니겠나. 결국 함께 가기 어렵다. 보수세력이 민족주의를 좋아하지도 않고 비판할 수 있다면 언제든 비판하려고 하는 것이다. 노무현 정권 하에서도 보아왔던 일이다.

진보세력은 70년대 이후에 학생운동이나 노동운동 과정에서 성장을 했는데 그 과정에서 민족주의적 경향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 와서 지구화 과정 통해 많이 약화됐다. 일부 진보 지식인들은 근대주의적 해석을 맹신하면서 민족주의를 윤리적으로 비판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그래서 지금 한국 사회에서는 보수나 진보나 모두 민족주의를 비판하는데 근대주의적 해석이란 것을 이용하고 있다. 이 근대주의적 해석이라는 것이 상당히 문제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결국 민족주의에 대한 근대주의적 해석이 문제라 할 수 있겠다. 일단 근대주의자들은 민족이나 민족주의를 근대의 산물로 보는 데에 어떤 문제점이 있다고 보나?



근대주의자들이 민족이나 민족주의를 근대의 산물로 보는 것은 2차 대전 이후에 민족주의에 대한 연구가 새로운 단계로 들어서는데, 정치학이나 사회학, 인류학을 전공한 사회과학자들이 주도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역사적 접근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역사적 접근도 하지 않았다. 

이들은 이 당시에 식민지가 해방되고 많은 새로운 국가들이 탄생하는 것을 보면서 민족은 근대의 산물이 아니겠느냐,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거다. 그런데 그 전에는 영속주의가 주류적 해석이라서 짧아도 수백 년, 길면 수천 년 역사를 민족이 갖고 있다고 믿었던 것이고, 그 때는 민족주의에 대한 해석을 주도했던 사람들이 역사학자들이다. 

1930년대, 40년대에 민족주의 연구를 주도했던 인물이 칼톤 헤이즈(Carlton Hayes), 한스 콘(Hans Kohn)이 있다. 이 사람들은 민족주의의 이념적 뿌리를 독일 계몽사상에서 찾았다. 칸트(Immanuel Kant)라든가 헤르더(Johann Gottfried Herder),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 이런 사람들에게서 찾았고 이런 전통은 1960년에 민족주의 책을 쓴 엘리 케두리(Elie Kedourie)가 계승했다. 

그런데 이러한 역사적인 접근이나 이념적인 접근들이 사회과학자들에게는 불만족스러웠다. 근대주의적 해석을 처음 시작한 겔너가 왜 민족주의 연구를 시작했느냐, 그것은 케두리하고 같은 대학에 있었는데, 케두리가 사상사적인 접근하는 것을 보고, 그게 만족스럽지 않았다고 얘기한다. 

그래서 이 사람은 사회의 구조적인 변화 속에서 민족주의의 원인을 찾으려고 했다.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의 전환 과정, 산업화 과정 속에서 민족주의가 만들어졌다, 이렇게 믿은 것이다. 

겔너는 전근대의 농업사회에서는 문화가 신분별로 귀족하고 평민하고 나눠져 있고, 지역별로도 어느 정도 자족성 있기 때문에 전국적인 문화적 동질성이 형성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산업사회에 들어오면 노동자들에게 노동시키기 위해서 국가에서 최소한의 교육을 시킨다. 숫자를 셈한다든가, 알파벳을 읽게 한다든가, 그 정도의 대중교육을 시키는데 국가가 주도해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게 된다. 그런 과정에서 전국적인 동질적 문화가 형성되고, 이렇게 만들어진 문화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만든 정치 이데올로기가 민족주의다,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그리고 그 민족주의가 민족을 만들어낸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겔너에 따르면 민족주의와 민족은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넘어가는 구조변화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산업화에서 원인을 찾는 사람도 있고 앤더슨이나 홉스봄은 자본주의에서 원인을 찾는다. 그 다음에 근대국가 형성에서 원인을 찾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새로운 연구 경향이 민족과 민족주의를 구조적으로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준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지나치게 근대적 요소를 강조하고, 그에 따라서 근대와 전근대 사이의 질적 차이를 강조하기 때문에 비역사적인 접근을 하게 된다는 것은 상당히 문제다. 실제로 이런 주장들은 역사적 사실들에 부합하지 않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역사적으로 검증이 안 된 주장들이라는 얘기다. 

겔너의 경우 산업화 결과로 민족주의가 나타났다고 하지만 그것은 이론적인 것이고, 구체적으로 프랑스 혁명 때 처음으로 근대적 민족주의가 나타났다고 하는데 프랑스 혁명은 산업화 이전에 일어난 사건이다. 산업화와는 별 관계가 없다. 

또 19세기 후반의 동유럽이나 20세기의 아시아, 아프리카에 새롭게 형성된 많은 민족들도 산업화와 관계가 없다. 그래서 산업화와 민족의 형성을 결부시키려는 시도는 역사적으로는 지지받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근대주의자들이 지나치게 근대적 요소를 강조하면서 근대와 전근대의 민족주의의 차이를 부각시킨다고 했는데, 근대와 전근대 민족주의를 가르는 기준은 무엇인가?



근대주의자들은 근대 민족주의는 명확한 정치 이데올로기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전근대의 민족주의와는 구분된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정치 이데올로기가 크게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고 보는데, 하나는 민족주권이다. 주권이 민족에게 있다는 것은 민족의 구심점이 왕이나 귀족이 아니라 민족 전체에게 있고, 따라서 그런 상황에서 민족의 모든 구성원은 평등한 관계에 있기 때문에 민족을 위해 목숨을 희생할 준비가 돼 있다고 보는 것이다. 전근대에 민족의식이 귀족이나 지식인 등 일부 엘리트 집단, 도시나 특정 지역 같은 작은 정치단위에 제한돼 있던 것과는 다르다는 주장이다.

두 번째는 민족자결의 원리다. 정치적인 자주성 얘기다. 모든 민족이 그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는 정치적 자율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고, 따라서 외세의 지배를 용납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다. 

세 번째는 민족의식이나 민족감정이 정치적 운동을 일으킬 정도로 충분히 성숙해야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민족 정체성의 문제다. 전근대 사회에서는 민족 정체성이 그렇게까지 성숙하지 않았다고 보고 있다.

근대주의자는 이렇게 아주 단순하고 명료한 기준을 갖고 있다. 그래서 적용하기가 편하다. 그러나 기준이 너무나 엄격하기 때문에 거기에 부합하지 않는 현상들은 배제할 가능성 있고 실제로 많은 근대 민족주의들도 이 기준을 충족시키지는 못한다. 

프랑스 혁명 이후의 프랑스에서도 민족주권이라든가 민족 정체성 개념이 충분히 관철되지는 않았다. 말하자면 프랑스 혁명 이후에도 자기가 민족의 일원이라고 느끼는 사람들은 국민들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부르주아 계급을 중심으로 해서. 농민은 아니다. 농민들이 자신들이 민족의 일원이라고 느낀 것은 1870년대 이후다. 근대에 들어와서도 민족 구심점으로 왕이나 종교가 되는 경우도 상당히 많다. 어디서나 민족주권이 관철되는 건 아니었다. 따라서 이렇게 엄격한 기준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전근대 민족주의에 대해서도 충분히 얘기할 수 있다.

어떤 현상이라는 것도 역사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이것을 전근대와 근대를 칼로 자르듯 양단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것이 못 된다. 이건 왜 그러냐면 근대주의자들이 사회과학자이기 때문에 역사 연구를 할 역량도 부족하고 관심도 적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전근대의 민족과 민족주의는 언제부터 생겨났다고 볼 수 있나?



유럽에서 중세국가가 생겨난 것은 10세기에서 11세기 사이다. 대표적인 나라들이 중세 독일, 중세 프랑스, 중세 영국, 잉글랜드다. 독일은 911년, 프랑스 987년, 잉글랜드 1066년에 국가를 형성하게 된다. 이때부터 민족의 단초는 형성됐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보다 뚜렷이 나타나는 것은 14세기부터다. 그 긴 과정을 다 설명하기는 어려우니 두 가지 예만 드리겠다. 

하나는 1320년에 잉글랜드 위쪽의 스코틀랜드에 살고 있던 스코트족 얘기다. 스코트족이 아브로스(Abroath) 선언이란 것을 했다. 남쪽의 잉글랜드 왕인 에드워드 1세가 계속 스코틀랜드 사람들을 못 살게 구니까 로마 교황에게 탄원서를 낸다. 우리 독립하게 도와주십쇼, 얘기한 건데 내용이 재미있다. 일부 발췌를 했다. 

‘스코트 족은 대 스키타이에서 와서 (중략) 스페인에서 오랫동안 살았다. 그리고 많은 승리와 노력을 하여 오늘날의 영토를 확보했다. 이 왕국은 대대로 130명의 왕이 다스렸고 한 번도 외부인에 의해 왕통이 무너진 적이 없다. (중략) 우리 민족은 ‘신의 백성’으로 다른 탁월한 민족들 사이에서 많은 특징에 의해 구분된다. (중략) 우리는 영광이나 부, 명예를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자유만을 위해 싸운다. 그것은 훌륭한 사람이라면 죽지 않는 한 포기할 수 없다. (중략) 우리는 100명이라도 살아남는 한 결코 어떤 조건하에서도 잉글랜드인의 지배에 복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상 독립선언문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렇게 볼 수 있다. 여기서 민족의 기원과 영토, 민족적 특수성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이것은 민족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다. 상당한 정도의 민족 정체성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 ‘외부인에 의해 왕통이 무너진 적이 없다’, ‘자유만을 위해 죽을 때까지 싸운다’, ‘결코 어떤 조건하에서도 잉글랜드인의 지배에 복속되지는 않겠다’, 이것은 민족의 자결권에 관한 얘기다. 정치적 자주성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서명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냐면 당시 스코틀랜드 지배 계층인 영주들, 성직자들, 부유한 자유농들에 한정돼 있었다. 민초들에게까지는 아니지만 민족주권이라는 것도 상당히 제한된 형태이기는 하지만 존재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확장된다. 

프랑스의 경우도 프랑스 혁명 전야에 왕의 주권으로부터 귀족 주권으로 해서 그 다음에 민족 주권으로 넘어갔다. 스코틀랜드는 14세기 얘기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 

또 하나의 예는 로마카톨릭의 콘스탄츠(독일 남부 호수가 도시)라는 곳에서 공의회를 열었다. 1414년에서 1418년 사이인데, 여기 참석한 잉글랜드 대표단이 한 얘기다. 

‘민족이 다른 사람들과 혈연이나 관습, 언어에서 구분되는 사람들로 이해되든 말든, 또 민족이 프랑스 민족의 영토와 마찬가지로 영토로 이해되든 말든 잉글랜드 민족은 진정한 민족이다.’


민족을 규정하는 요소들이 거론되는 것으로 보이는데.



중요한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오늘날 민족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규정하냐면 혈통, 관습, 언어, 영토, 역사, 문화로써 민족을 규정한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혈연, 관습, 언어, 영토, 네 가지를 얘기한다. 사실 오늘날 얘기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 당시에도 벌써 민족에 대한 생각이 사람들 사이에서 상당히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것 알고 있다. 물론 이때도 민족은 잉글랜드인 전체를 포괄하는 것은 아니고 학자들 얘기로는 약 5%만이 자기를 민족으로 생각했다.

이런 것들을 보면 이 시기 유럽에서 민족 정체성이나 민족주의 이데올로기가 덜 발전된 형태지만 이미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특히 영국과 프랑스 간 백년전쟁 때 상당히 강화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잔 다르크 같은 경우가 민족의 구심점이 되는 것이다.

16세기부터는 민족이라는 말이 오늘날과 별 차이 없는 의미로 사용되고 그 후에 지속적으로 사용된다. 그 전에는 네이션(nation)이라는 말이 조금 다른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는데, 이후에는 지금과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그러나 민족 정체성과 민족주의는 17, 18세기에 특히 영국과 프랑스에서 강화되는데, 이는 두 나라가 식민지를 둘러싸고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는 것과 관련이 있다. 그 절정이 18세기 말 7년 전쟁이다. 당시에 보면 프랑스 혁명 당시의 민족주의와 큰 차이가 없다. 

중요한 점은 전근대 민족주의가 근대 민족주의의 기준으로 보면 불완전한 건 사실이지만, 둘 사이에 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고 단지 정도나 범위의 차이일 뿐이었다는 것이다. 민족 정체성을 느끼는 정도, 민족주권에 포함되는 사람들의 범위일 뿐이지 어떤 질적 차이가 있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민족이 프랑스 혁명을 계기로 갑작스럽게 나타난 것은 아니고, 혁명 이후에도 민족의 범위는 계속 확장되는 과정을 볼 수 있다. 따라서 민족이나 민족주의를 절대적으로 근대적 현상으로 보는 근대주의자들 태도는 문제가 많다고 할 수 있다.


민족이 ‘상상의 공동체’, 또는 ‘지배계급이 만들어낸 도구’라는 견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베네딕트 앤더슨이 만들어낸 ‘상상의 공동체’라는 말은 오늘날 민족의 허구성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용어로 사용되면서 민족이나 민족주의의 정당성을 약화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는 원초적인 마을의 규모를 넘어서는 인간 공동체 안에서 사는 사람들은 평생 서로를 본 적도 없고 알 수도 없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민족 구성원들은 상상의 행위를 통해서만 자신이 민족의 일원이라는 것을 알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 매개가 되는 것이 신문이나 대중소설이라는 것이 앤더슨의 주장이다. 

이런 인식은 많은 근대주의자들이 민족이나 민족주의가 사회적으로 ‘구성된’, 인위적 성격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은 민족이란 민족주의 엘리트들이 근대에 들어와 조심스럽게 만든 사회적 구성물과 문화적 인공물이라고 주장한다. 민족주의자들이 대중에게 다양한 문화적 매체나 사회적 예식을 통해 보여줌으로써 민족을 ‘발명’하고 ‘상상’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민족이 자연적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지구화 시대에 들어와 그것이 폐기된다 해도 전혀 문제가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인공물이니 만치 용도가 사라지면 폐기처분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민족이 ‘역사적’으로 형성된 과정을 경시하는 것이다. 긴 경우 수천 년, 또는 수백 년에 걸쳐 종족성 정체성이 어떻게 형성됐고 문화가 어떻게 응집됐는지를 간과하는 것이다. 물론 19세기 이후 민족주의 엘리트들이 민족형성 과정에 일부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사실이나 그것도 종족성이라는 핵심이 존재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따라서 근대주의자들은 자기들이 인공적인 구성물이라고 보는 민족을 위해 왜 많은 나라 사람들이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희생하려고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또 그들이 이론적으로 민족을 해체했다고 주장하는 데도 왜 많은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민족에 매달리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모두 역사와 문화, 종족성의 중요성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기 때문이다.


민족주의는 일종의 ‘동일화’를 강조하는 논리라는 점에서 개개인이 갖고 있는 차이나 다양성을 희석시키는 경향이 있다는 지적이 있다. 또 계급적, 젠더적 모순 등 다른 여러 사회적 모순을 도외시할 수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나?



이것은 민족주의에 대해 윤리적인 면에서 가장 먼저 제기되는 문제이다. 그것이 집단을 강조하고 개인의 자유나 자율성을 경시 내지 무시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연히 자유주의적인 가치인 관용이나 개인의 권리에 대한 존중, 다원주의도 존재할 수 없고 개인을 집단이나, 심할 경우 전체주의적 체제에까지 종속시킨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는 당연히 계급 간의 지배, 예속 문제라든가 성별에 따른 차별 문제는 희석되거나 무시될 수밖에 없다고 보는 것이다. 

민족주의가 이런 인상을 준 것은 20세기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파시스트 독재가 민족주의와 연관되어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 전쟁에서의 승리자가 영미인이며 그 후 민족주의연구를 주도한 것도 영미계 학자들이기 때문인데 영국이나 미국이 개인주의를 중요한 가치로 삼는 자유주의 국가이기 때문이다. 

또 한편에서 유대인 출신 민족주의 연구자들의 역할도 크다. 사실 민족주의의 주된 연구자들 가운데는 유대인 출신이 많은데 케두리, 겔너, 홉스봄 등이 모두 그런 사람들이다. 나치 독일에 대해 나쁜 기억을 가지고 있으니 민족주의에 대해서는 좋은 감정을 가질 수가 없다. 

그러나 민족주의 이념도 천차만별이니만치 모두 자유주의적 가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19세기 중반까지의 민족주의는 자유주의와 잘 결합했고 지금도 서양학자들 가운데는 데이비드 밀러(David Miller)나 야엘 타미르같이 자유주의적 민족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모두가 민족주의에 적대적인 것이 아니다. 

사실 민족주의의 부정적 측면은 그것이 어떤 정치체제와 결합하느냐에 따라 매우 달라진다. 민주적 질서가 잘 자리 잡은 나라에서는 그것이 큰 문제가 안 된다. 미국이 지금 애국주의를 부르짖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애국주의는 민족주의의 미국식 이름일 뿐이다. 

오히려 민족주의는 타미르가 말하는 바와 같이 민족 구성원들에게 자신의 정체성과 뿌리를 확인시켜주고, 서로에 대한 배려와 관심을 불러일으켜 도덕적인 세계를 만들고, 현대세계의 특징인 고립감과 소외를 줄여줄 수도 있다. 한국사회는 민주화의 정도가 상당히 높은 나라이므로 이 문제에 대해 특별히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또 일반적으로 말한다면 어떤 이데올로기든 다 장점과 결점을 가지고 있다.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는 소련에서와 같은 극악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가져온 바 있고 자유주의는 최근의 신자유주의에서 보듯이 승자독식의 비윤리적인 측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런 측면에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도 공평한 시각에서 볼 필요가 있다.


배타주의나 과거 전쟁 등 극한 갈등 상황에서 나타났던 민족 간 학살의 문제는 민족주의에 부정적인 이미지를 덧씌웠던 것도 사실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나?



20세기 후반의 아프리카에서 종종 발생한 종족사이의 극심한 갈등이나 학살은 과거 강대국들의 분리통치(디바이드 앤 룰:Devide & Rule) 기술을 이용한 식민지 정책의 결과다. 여러 종족들이 서로 견제하고 경쟁하도록 만들어 식민지배를 쉽게 하려는 것이다. 식민지에서 해방된 이후 식민지 경계선이 그대로 새 국가의 국경선이 되면서 그 안에 포함된 여러 종족 사이의 갈등이 되풀이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민족주의와는 별 관계가 없다. 

나치 독일의 유태인 학살은 민족주의도 약간 관련이 있기는 하나 주로 인종주의와 관련된 사안이다. 유럽의 반유대주의는 19세기 말에 부쩍 강화됐는데 이는 혈통에 따라 유대인을 차별하는 생물학적 인종주의에 속하는 것이다. 히틀러도 젊은 시절에 그 세례를 받은 인물로 당시대인의 대부분이 그렇다. 따라서 그가 특별한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다. 

나치 독일은 독일 민족을 아리아 민족으로 부르며 세계 최고의 민족으로 치켜세우고 신비화했는데 아리아 민족도 원래는 인종주의와 관련돼 만들어진 가공의 민족이다. 18세기 말에 인도어와 유럽어와의 관련성이 알려지며 인도-유럽어족이라는 관념이 생겼는데 얼마 안 가 유럽인들은 이 언어계통에 속하는 사람들을 인도-유럽 인종으로 인종적으로 규정했다.

19세기 초에는 이 인도-유럽인종에다 헤로도토스의 책에서 따온 ‘아리아’라는 이름을 붙여 아리아 인종, 또는 아리아 민족으로 불렀다. 독일인들은 유대인인 샘계 인종보다 훨씬 우월한 아리아 인종이 인도접경의 아시아 고산지대에서 처음 출현해 차차 유럽으로 이주했고 그 최고의 유전형질이 남아 있는 민족이 바로 튜톤(독일)민족이라고 생각했다. 유대인의 학살은 바로 이 아리아 민족의 순수한 혈통을 보존하기 위해서였다. 

보스니아의 종족학살도 종교적, 종족적인 여러 요소가 매우 복잡하게 결합하여 발생한 것이다. 오스만 튀르크의 지배로 거슬러 올라가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므로 단순히 최근 민족주의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그렇다면 우리 안에 민족 또는 민족주의에 대한 잘못된 편견이 있다면 어떤 것인가?



최근에 한국사회에서 인종주의 문제가 불거지며 민족주의가 매도를 당하는 일이 벌어진 바 있다. 한국인들이 인종주의와 민족주의를 혼동하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에서 외국인 노동자나 외국인 신부가 차별대우와 학대를 받는 것은 인종주의의 문제이고 우리가 하루 빨리 극복해야 할 과제다.

그런데 이 문제와 관련해 몇 년 전 유엔이 우리 정부에 대해 단일민족이라는 표현을 쓰지 말도록 권고한 바 있다. 사람들에게 한국사회가 단일민족으로 구성되었다는 생각을 불어 넣어줌으로써 인종차별의 빌미를 만든다는 의미에서였을 것이다. 

그러자 일부 사람들은 한국이 역사 속에서 수많은 종족들이 유입돼 만들어졌는데 무슨 단일종족이냐고 주장하기도 하고, 또 단군신화를 폐기처분해야 한다는 과격한 주장을 펴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면서 ‘다문화’라는 말이 유행하고 노동력이 부족하니 외국인노동자를 더 받아 들여야 한다는 괴상한 논리들도 등장했다.

그런데 인종과 민족은 서로 범주가 다른 개념이다. 인종은 피부색이나 용모, 체격 등 신체적 조건과 관련해 인간 집단을 구분하는 것으로 생물학적인 범주에 속한다. 반면 민족이란 언어, 혈통, 역사, 영토, 문화, 관습 등에 의해 인간집단을 구분하는 주로 문화적인 범주의 개념이다. 따라서 이 점을 명확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 

한국인이 단일민족이 아니라는 주장은 오랜 세월에 걸쳐 여러 종족들이 뒤섞여 만들어졌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남방계 종족이 대거 유입된 것은 아마 삼국시대 이전일 것이다. 신라나 백제는 북으로부터 내려온 외부 종족의 유입에 의해 건설된 것 같다. 

그러나 어쨌든 고려시대에 오면 이 모든 종족들이 하나의 민족으로 통합돼 지금까지 안정된 상태를 유지해 왔다. 지역 갈등이 과거의 흔적을 약간 남기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는 하나 민족 내부에 다종족국가들의 경우와 같은 종족들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니 한국이 단일민족 국가가 아니라는 주장은 헛소리에 불과하다.

외국인 노동자나 신부에 대한 인종적 차별은 당연히 금해야 하나 그렇다고 단군신화를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지나친 논리의 비약이다. 단군은 우리 민족의 상징적인 조상으로 매우 중요한 존재이다. 어느 나라에서도 이런 식의 천박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없다.

한국인이 단일민족이 된 것은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고 자연적으로 그렇게 된 것이다. 자랑스러울 것도 없고 부끄러워할 것도 없다. 또 많은 다종족국가들이 종족 간 갈등으로 분란을 겪는 것을 보면 단일민족에 긍정적인 면도 없지 않다.

다문화주의를 자꾸 얘기하면서 다종족사회가 이상적인 사회라는 잘못된 편견이 확산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다문화주의는 원래 이민으로 구성된 국가로 종족 사이의 갈등으로 골치를 겪는 미국에서 고육지책으로 만들어진 개념이다. 우리가 그것을 반드시 받아들여야 할 이유는 없다. 외국인 노동자나 외국인 신부에 대한 차별을 금하고 그들의 인권을 보장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본다.


민족, 또는 민족주의가 어떤 선입견으로 잘못 이해되고 있다면 이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두 가지 점을 말할 수 있다고 본다. 하나는 현실인식 문제와 관련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민족주의 이론, 즉 학문적 차원과 관련된 이야기다. 

현실문제에서는 동아시아 국제정치의 이해와 오늘날의 신자유주의 국제경제, 통일문제를 어떻게 인식하느냐가 중요하다고 본다. 이런 현실을 정확하게 철저하게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먼저 동아시아 국제정치에서 한국이 어떤 상황에 있는지 잘 판단하는 것이 중요하다. 현재 동아시아에서는 민족주의가 점점 팽배해 가고 있다. 그것은 미국의 패권주의가 약화되고 중국이 부상하며 일본이 스스로의 입지에 대해 매우 불안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중국은 과거 1세기 동안이나 외세에 시달리며 정신적으로 큰 민족적 내상을 입고 있다. 경제적, 정치적 힘이 증대함에 따라 그것을 회복하려는 강렬한 열망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민족주의로 나타나서 아시아에서의 정치력과 군사력을 확장하려 한다. 그리하여 미국의 해양 봉쇄선을 뚫고 태평양으로 나아가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일본도 지금까지 미국에 정치, 경제, 군사적인 면에서 전적으로 의존했었으나 이제 그것이 더 이상 불가능한 상황임을 깨닫게 됐다. 이런 상황에서 보통국가론 등을 내세우며 국가의 자주성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난 지는 오래다. 경제침체가 오래 지속되고 후쿠시마 원전 사고 등으로 국민들의 사기가 떨어지자 최근에는 극우적 책동이 민족주의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동아시아 3국 가운데 가장 취약한 나라인 한국에서는 오히려 평화와 연대만을 부르짖고 민족주의를 도외시하는 이상한 풍조가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비정상적인 일로 우리가 동아시아 국제정치의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한 결과로 보인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인식도 매우 문제다. 신자유주의 시대는 무역과 금융의 자유화를 통한 단일 세계시장의 형성이라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이것을 주도하는 미국과 선진자본주의국가들은 이 체제는 모든 국가들에게 호혜적이며 따라서 여기에는 중심부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국제경제체제를 짜고 유지해왔고 그 과정에서 제3세계 국가들을 착취하고 있다. 1982년에 신자유주의 질서를 국제사회에 처음 강요한 이후 라틴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 대부분의 후진국 경제가 초토화된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한국도 IMF 체제를 겪으며 그런 상황에 빠졌다. 단순히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의 수출이 잘 된다고 환호할 일이 아니라 선진국과 그 자본에 대한 우리 경제의 예속성이 얼마나 심해졌는가에 대해 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남북관계는 정부가 바뀔 때마다 정책이 달라지고 남북의 이해관계에 따라 삐걱거려서 현재로서는 언제 통일이 가능할지 전혀 예측하기 어렵게 됐다. 북이 핵무기와 미사일을 가지고 있는 상황이므로 김정은 체제가 더 안정된다면 통일은 당분간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인내심을 가지고 서로 민족적인 동질성을 확인하고 확대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민족에 대해 우리가 더 고민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현실 문제에서 그렇다면 학문적 차원에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학문적인 차원에서는 민족주의 이론을 우리 입장에서 제대로 보고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학문은 서양 학문에 과도하게 종속돼 있으며 민족주의 이론도 예외는 아니다. 근대주의적 해석은 매우 유럽중심적인 이론체계로써 근대의 유럽을 그 준거틀로 보고 다른 지역의 민족주의를 판단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영미계 학자들이다. 

그런데 영국이나 미국은 신자유주의 체제의 중심 국가들로서 그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자기네에게 가장 유리한 나라들이다. 자연히 그에 대해 저항하는 민족주의는 그들에게 불편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민족주의에 대해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관점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민족주의란 정치적 자주성과 함께 경제적 자족성, 문화적 고유성을 강조하는 이데올로기이다. 후진국이나 약소국들에게는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최선의 방책이다. 따라서 민족주의를 비판적으로 보는 서양인들의 민족주의 이론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우리의 정신적인 무기를 송두리째 포기한다는 의미와도 같다. 

학문에, 특히 민족주의 이론같이 국익에 큰 영향을 주는 이론에 모든 나라에 보편적인 원리라는 것은 없다. 강대국과 약소국의 이론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것은 우리가 민족주의 이론에 대해서도 보다 관심을 갖고 깊이 있게 대응해야 할 이유라고 본다. 민족주의에 대한 근대주의적 해석을 철저하게 다시 검토하고 그것을 극복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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